신나무골 성지 신나무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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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소개

신나무골 성지 구석구석

한옥 지붕

성지 내에서 대표적인 한옥 지붕을 감상할 수 있다. 궁궐에서만 사용되는 기법인 흰색 용마루를 성당의 팔작지붕에 활용해 성전의 품격을 높였다. 성당 옆 사제관은 우진각지붕이며, 성당 옆 쉼터는 맞배지붕으로 만들었다. 옛 사제관과 휴게실은 초가지붕으로 표현했다.

· 팔작지붕 : 여덟 팔(八)자를 닮은 지붕
· 우진각지붕 : 모서리를 강조한 지붕
· 맞배지붕 : 옆면이 마주보고 있는 지붕
· 초가지붕 : 초가로 만든 지붕

신나무

신나무(Acer ginnala, 莘)는 단풍나무에 속하며, 8m 가량 자란다. 나무껍질은 검은 빛을 띤 갈색이며 잎이 3갈래이다. 5~7월 노란빛을 띤 흰색으로 꽃이 피고, 향기가 난다. 단풍이 단연 돋보이고, 잎으로 회흑색의 물감을 얻어 법복 등을 물들이는데 쓰였다. 잎눈은 약재로 눈병, 설사를 멎게 하고, 다친 피부의 분비물을 마르게 한다. 명칭이 눈병에 ‘눈을 씻는다.’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염료로 ‘색을 낸다.’에서 ‘싣(色)나모’가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조경수로 적합하고, 분재의 소재가 되며, 지팡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고로쇠 수액보다 효능이 좋고, 달여서 시럽을 만들며, 어린잎은 차로도 마신다. 성질이 차고, 음지에서 잘 자라고 공해에 강하다.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는 1885년 12월 이이전 안드레아(李以全)에게 마루 하나가 있는 3칸짜리 공소 건물, 서당 선생 집, 논을 사서 2년을 살았다. 1887년 11월 보두네(Francois Xavier Baudounet, 尹沙勿, 1859~1915) 신부가 18개월, 1889년 3월 죠조(Moyse Jozeau, 趙得夏, 1866~1894) 신부가 1년을 살았다. 1894년 4월 파이야스(Camillus Cyprien Pailhasse, 河敬朝, 1868~1903) 신부가 와서 1895년 9월 가실로 거처를 옮겼고, 신나무골은 공소가 됐다.
1984년 남방 첫 본당 터를 복원했지만, 위치와 방향과 모습이 정확하지 않았다. 새방골 사제관 옛날 사진을 활용해 2018년 새롭게 복원했다.

십자가형 한옥성당

십자가형 한옥 성당은 1898년 12월 25일 축성했다. 약현성당(1893년), 답동성당(1896년), 명동성당(1898년) 다음으로 성당이 건립됐다. 성당은 가로, 세로 9척 9간[25m]으로 총 45간이었고, 십자가형 한옥 기와집 성전을 ‘루르드의 성모 성당’이라 했다. 하지만 목조 건물인 한옥 성당은 완공된 지 2년 2개월만인 1901년 2월 4일 밤 8시경 지진으로 시작된 화재로 전소됐다. 로베르 신부는 곧바로 프와넬 신부의 설계도를 따라 1902년 11월 25일 새롭게 고딕식 성당을 완공했다. 1903년 11월 1일 축성했고, 대구 대목구가 설립된 후 드망즈 주교님이 증축해 1919년 5월 11일 축성했다.

신나무골 상징 십자가

신나무골에 복원된 성당은 세로 20m, 가로 6m이며, 지붕 위의 십자가와 창문은 옛 사진을 보고 재현했다. 한옥 지붕 위에 십자가를 세운 것은 국내 최초이며, 신나무골 상징 십자가이다.
지붕과 막새기와와 담장 등에 있는 둥근 모양의 십자가도 신나무골 상징 십자가이다. 계산성당 초창기 대문 담장에 있던 문양으로 현재 성모당 가장 윗부분에 24개의 십자가가 있다. 성당 안에 제대는 계산성당 제대를 모방했고, 제대는 이동용으로 제작됐다.

상량문

신나무골 성당은 1901년 2월 4일 화재로 소실된 계산동 십자가형 한옥성당을 본받아 세로 23m, 가로 14m[지붕 기준]로 지었다. 2017년 겨울부터 목재소에서 기둥과 대들보 등을 다듬었다. 2018년 2월 28일 기공식을 가진 이후 옛 가옥 철거와 측량, 옹벽과 배수로 설치, 평탄 작업과 건물의 기초를 세웠다. 완벽하진 않지만 사진을 참고해 예전과 같은 문양의 창, 지붕 위의 십자가를 세웠다.
상량식은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릴 때 지내는 의식이다. 건축에서 마룻대는 건물의 중심으로 축원과 건물의 건립 연대를 알 수 있게 일시를 기입한다. 참고로 신리 성지에 천주교식 상량 대들보가 있다. 신나무골 성지 상량문에 교구장의 사목 표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와 한글 서명을 넣었다.

유해와 공적경배

순교자(martyr)는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신앙의 증인이고, 하느님의 종(servus Dei)은 성덕이나 순교의 평판이 높은 가운데 순교한 사람으로 복자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경칭이다. 공적으로 경배가 가능한 단계가 되면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라 칭한다. 교회가 생전의 덕행, 순교 사실, 기적 등을 검토하여 특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된 사람들을 복자(福者, Beatus, Beata)나 성인(聖人, Sanctus, Sancta, saint)으로 칭한다.
복자는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공경(공식 기도문)을 받고 성인은 세계 어디에서나 공경을 받는다. 복자와 성인의 유해는 공적으로 경배할 수 있지만, 순교자의 유해는 공적 경배가 금지돼 있다.(교회법 1187조) 복자의 그림에 후광은 가능하나, 머리 위 금테두리는 성인에게만 허용된다. 성인에게 성당과 제대를 봉헌할 수 있고, 주보성인의 선정이 가능하다. 제대(altar) 안쪽이나 밑에 순교자나 성인의 유해를 보존할 수 있어도 제대 상 위에는 두지 말아야 한다.

성모상

로베르 신부는 중국 예수회 선교사 이탁(李鐸)의 신심서 『성모성월』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1887년 출간했다. 계산동에 십자가형 한옥 성당을 짓고 ‘루르드의 성모 성당’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성당 앞에 루르드의 성모를 모셨다.

우물 터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할 무렵 8~9가구의 36명의 신자가 있었다. 마을에 신자들이 마시는 우물이 있었는데, 현재 십자가형 성당의 기둥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물터를 모형 형태로 복원했다.

빨래터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할 무렵 8~9가구의 36명의 신자가 있었다. 마을에 내[카페 옆 도로]가 있었고, 냇가 옆에 빨래를 하는데 사용했던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 디딜방앗간[카페 자리]이 있었다. 우물과 작은 연못을 상징해 카페 옆에 실개천을 만들었다.

순례지

“순례지는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한다.”(교회법 1230조) 성지(聖地, Terra sancta)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 생활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땅인 팔레스티나를 뜻한다.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순교자, 성모발현, 성인과 관련된 지역으로 확대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장소나 장소를 교구장들이 성지(聖趾, loci sancti)로 선포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종’, ‘복자’, ‘성인’이 순교한 곳이나 무덤이 있으며 전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소를 성지(聖趾, loci sancti, holy places)라 하고, 그 외 순교자가 삶과 연관된 장소를 순교 사적지(殉敎史跡地)라 부르고 있다. 순교자와 관계없지만 신앙 선조들의 삶과 영성이 담겨 있는 곳을 순례지(巡禮地, Sanctuariis)로 칭했다.